
'악마'라는 단어를 들으면 공포영화를 떠올리시나요? 저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막상 극장에 앉아 2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 영화는 공포가 아니라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였더군요. 새벽 2시마다 깨어나는 악마, 그걸 돌봐주는 옆집 백수 청년. 얼핏 들으면 황당한 설정이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옆집 사람 얼굴도 모르고 사는 우리에게 묘하게 와닿는 지점이 있습니다. 저 역시 복도에서 새벽 내내 울려퍼지는 음악 소리 때문에 잠을 설쳤던 경험이 있어서, 이웃이라는 존재가 때론 위로가 되고 때론 '악마' 같을 수 있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배우 캐스팅과 연기, 예상을 깨는 조합
안보현 배우를 보면 보통 강렬한 악역이나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을 떠올리게 됩니다. 실제로 '이태원 클라쓰'나 '베테랑 2' 같은 작품에서 그런 이미지를 확고히 했죠.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 안보현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리숙하고 순박한 백수 청년 '길구' 역할인데, 저는 오히려 이런 캐릭터가 그에게 더 잘 어울린다고 느꼈습니다.
윤아 배우의 경우 처음엔 제 기대와 달라서 당황스러웠습니다. 낮에는 평범한 여성이었다가 밤이 되면 악마로 변하는 '1인 2역' 구조인데, 악마 연기가 과하게 느껴졌거든요. "왜 저렇게 어색하지?" 싶었는데, 영화 후반부에 진실이 밝혀지면서 그 어색함이 의도된 연출이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여기서 '페르소나(Persona)'라는 개념이 떠올랐는데, 심리학에서 페르소나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는 가면을 의미합니다(출처: 한국심리학회). 윤아가 연기한 캐릭터는 실제로는 어린 존재가 '악마'라는 페르소나를 쓰고 있었던 거죠. 그래서 일부러 과장되고 어색한 연기를 한 겁니다. 이걸 깨닫고 나니 윤아의 연기가 오히려 정교하게 느껴졌습니다.
성동일과 주현영은 각각 아버지와 사촌 동생 역할로 등장하는데, 두 배우 모두 본인의 색깔을 잘 살린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특히 성동일이 딸을 수십 년간 케어해온 지친 아버지의 모습을 표현하는 장면에서는 묵직한 감정선이 느껴졌습니다.
장르 혼합, 한 방이 없는 아쉬움
이 영화는 장르를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습니다. 로맨스인 듯하면서도 코미디 요소가 있고, 오컬트 분위기가 감돌다가도 드라마로 흘러갑니다. 여기서 '하이브리드 장르(Hybrid Genre)'라는 용법이 등장하는데, 하이브리드 장르란 두 개 이상의 서로 다른 장르를 혼합한 영화 형식을 말합니다. 최근 한국 영화에서 자주 시도되는 방식이죠.
문제는 여러 장르를 섞다 보니 어느 하나도 확실한 '한 방'이 없다는 점입니다. 코미디라고 하기엔 빵빵 터지는 웃음 포인트가 부족하고, 로맨스라고 하기엔 절절한 감정선이 약합니다. 오컬트 요소도 있지만 깊이 있게 파고들지 않아요. 저는 극장에서 보면서 "이게 뭐지?" 싶은 순간이 몇 번 있었습니다. 특히 중반부에 악마가 된 윤아를 케어하는 장면들이 반복되는데, 이 부분에서 리듬감이 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후반부에 밝혀지는 윤아의 사연도 예상 가능한 클리셰입니다. 한이 서린 과거, 가족의 희생, 그리고 성불이라는 구조는 이미 많은 작품에서 봐왔던 전개죠. 그래서 감동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새롭거나 충격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이상근 감독의 전작 '엑시트'가 94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던 걸 생각하면(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이번 작품은 그만한 임팩트를 주기엔 조금 부족해 보입니다.
다만 영화가 따뜻하다는 건 분명한 장점입니다. 자극적이지 않고, 해롭지 않은 영화예요. 가볍게 보기에 나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좀비딸'보다는 이 영화가 훨씬 나았다고 생각합니다. '좀비딸'은 모든 전개가 예상 범위 안에서 흘러가서 감흥이 없었거든요. '악마가 이사왔다'는 적어도 독특한 지점이 있었습니다.
감정선의 독특함, 로맨스가 아닌 이별
이 영화의 가장 독특한 지점은 감정선입니다. 안보현이 윤아를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반하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가 정을 붙이는 대상은 '윤아'가 아니라 '악마'가 됩니다. 정확히는 악마인 척하는 어린 존재에게 정이 드는 거죠. 이게 일반적인 로맨스와 다른 부분입니다.
여기서 '유사 가족(Pseudo-family)'이라는 사회학 용어가 떠오릅니다. 유사 가족이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가족과 같은 유대감을 형성한 관계를 말합니다. 안보현과 악마의 관계가 바로 이런 형태예요. 사랑이라고 보기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한 동정심도 아닙니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관계라고 할까요.
저는 새벽 내내 시끄러운 음악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잤던 적이 있다고 했죠. 그때 저는 옆집 사람을 '악마'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온한 제 일상을 방해하는 존재였으니까요.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생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악마처럼 보이는 행동도, 그 사람 입장에서는 나름의 사연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층간소음이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만요.
영화 후반부에서 안보현은 악마를 떠나보내야 합니다. 악마의 이름을 세 번 부르며 "돌아가라"고 말해야 하는데, 이 장면이 묘하게 먹먹합니다. 떠나보내는 게 악마를 위해서도, 윤아를 위해서도 맞는 선택이지만, 안보현 입장에서는 자기가 아끼던 존재와의 영원한 이별이거든요. 성동일이 수십 년간 딸의 몸에 들어온 존재를 케어해온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도 찡했습니다.
이 영화는 로맨스처럼 포장됐지만, 실제로는 '만남과 헤어짐', '위로와 이별'에 관한 드라마입니다. 저는 극장을 나오면서 "내 옆집 사람과도 저렇게 연결될 수 있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했습니다. 삭막한 도시에서 이웃이라는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습니다. 완벽하진 않지만, 따뜻하고 독특한 작품이었습니다. 가볍게 보기 좋은 영화를 찾는다면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