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좋은 소재와 완벽한 캐스팅을 가진 영화가 왜 기대만큼 감동을 주지 못할까요? 저는 영월의 겨울, 홀로 마음을 닫고 지내던 시절이 있었기에 <왕과 사는 남자>의 초반 설정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질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극장을 나서며 든 감정은 울컥함보다 아쉬움이 더 컸습니다. 천만 영화의 가능성을 품은 이 작품이 왜 중반까지 제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지 못했는지, 그리고 후반부에서 어떻게 간신히 수습했는지 솔직하게 나눠보려 합니다.
감정 빌드업: 교감의 과정이 생략된 초중반
이 영화의 핵심은 유배 온 폐위 군주(단종)와 마을 촌장 사이의 교감이 어떻게 쌓여가느냐에 있습니다. 여기서 '교감(交感, rapport)'이란 서로 다른 신분과 처지를 가진 두 인물이 점진적으로 마음을 열고 신뢰를 형성하는 심리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광해를 떠올려 보시는 분들도 많을 텐데, 저는 개인적으로 그 작품이 이 교감의 빌드업을 정말 섬세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왕과 사는 남자>는 이 가장 중요한 부분을 주요 장면 모음집처럼 툭툭 끊어서 보여줍니다. 촌장 아들이 글을 배우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 다음, 바로 글을 가르치는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그 사이 왕이 왜 마음을 열었는지, 아들은 어떤 계기로 용기를 냈는지에 대한 감정의 이음새가 없습니다. 저는 제가 겪었던 시골 마을의 할아버지처럼, 누군가 조건 없이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건네는 그런 작은 순간들이 쌓여야 진짜 마음이 열린다는 걸 압니다.
특히 절벽 장면은 정말 당황스러웠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왕을 욕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는 설정 자체는 괜찮은데, 그 다음 전개가 너무 급작스럽습니다. 감정선의 자연스러운 흐름 없이 갑자기 다음 신으로 넘어가니, 관객으로서 인물의 내면 변화를 따라갈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편집 완성도: 투박한 이음새가 만든 위화감
편집 리듬의 부자연스러움도 큰 문제였습니다. 여기서 '편집 리듬(editing rhythm)'이란 장면과 장면 사이의 전환 속도와 흐름을 의미하며, 관객이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빠져들도록 만드는 영화적 호흡입니다. 제가 느낀 초중반의 편집은 마치 유튜브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중요한 장면은 다 있는데, 그 장면들을 부드럽게 연결하는 연결 조직이 없습니다.
호랑이 CG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CG 기술 수준을 떠나서, 그 장면 자체가 이 영화의 핵심 은유이자 왕의 내면을 상징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연출이 너무 직설적이고 전후 맥락이 약해서, 관객이 그 상징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23년 관객 반응 조사에서도 '장면 전환의 자연스러움'이 영화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이 전체의 32%에 달한다고 나타났습니다(출처: 영화진흥위원회).
유해진 배우의 연기는 정말 훌륭했지만, 초반 캐릭터의 톤이 너무 과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 에너지가 영화의 몰입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배우 연기력: 후반부에서 빛난 진가
그래도 이 영화를 완전히 놓을 수 없었던 건 배우들 덕분입니다. 박지훈 배우가 보여준 단종의 모습은 정말 애처로우면서도 내면에 단단한 무언가를 품고 있었습니다. 초중반에 그의 연기가 잘 안 보였다는 평도 있는데, 저는 그게 배우의 문제라기보다 앞서 말한 편집과 서사 구조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후반부로 가면서 박지훈 배우의 눈빛 하나, 떨리는 목소리 하나가 모두 살아납니다.
박지훈 배우가 이정도로 연기를 잘하는 줄 몰랐는데 연기를 너무 잘해서 몰입감이 컸습니다. 눈빛의 서사가 있더라구요.
유해진 배우는 막판 통곡 장면에서 그동안 쌓아온 모든 에너지를 폭발시킵니다. 제가 시골 마을을 떠나던 날, 할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제 손을 꼭 잡아주시던 그 순간처럼, 말보다 강렬한 감정이 전해졌습니다. 유지태 배우의 한명회 역시 권력자의 냉혹함과 계산적인 아우라를 완벽하게 구현했습니다. 배역 캐스팅만큼은 정말 기가 막혔습니다.
전미도 배우의 궁녀 역도 마지막 장면에서 울컥함을 자아냈지만, 중간에 그와의 애틋한 에피소드가 한두 장면이라도 더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천만 영화가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췄지만, 초중반의 서사 밀도와 편집 완성도가 그 가능성을 반만 실현시킨 작품입니다. 후반부는 분명 수습에 성공했고, 배우들의 연기는 그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손색없습니다. 하지만 관객이 진짜 울컥하려면 앞부분에서 충분히 쌓아올린 감정의 계단이 필요합니다. 저는 배우들의 연기때문이라도 너무너무 추천하는 영화입니다.